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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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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스 바레스는 프랑스의 소설가, 정치인이자 사상가로, 상징주의와 민족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초기 작품에서 개인주의와 자아 숭배를 옹호했으나, 드레퓌스 사건 이후 국가주의자로 변모하여 반드레퓌스주의를 펼쳤다. 바레스는 "국가주의"라는 용어를 대중화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우익 단체에서 활동하며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을 역임했다. 그의 사상은 파시즘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했으며,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비판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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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바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3년의 바레스
본명오귀스트 모리스 바레스
출생일1862년 8월 19일
출생지프랑스 제2제국 보주주샤름
사망일1923년 12월 4일
사망지프랑스 제3공화국 센주뇌이쉬르센
안장지샤름 (보주주)
직업언론인
소설가
정치인
언어프랑스어
사조상징주의
프랑스 민족주의
주요 작품『정령의 숨결이 깃든 언덕』
『뿌리 뽑힌 사람들』
『콜레트 보도슈』

2. 생애

모리스 바레스는 로렌 지방 보주주 샬름에서 태어났다.[21][22] 8세에 프로이센의 점령을 경험한 것이 민족주의 사상가로서의 원점이 되었다. 낭시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1883년 파리대학교로 전학했다. 그의 문학 작품은 영국의 미학주의(Aestheticism)와 이탈리아 퇴폐주의(Decadentism)와 상응하는 사조인 상징주의(Symbolism (arts))와 관련이 있었으며, 가브리엘레 다눈치오(Gabriele d'Annunzio)와 가까운 동료였다. 그의 작품은 인본주의적인 자아 사랑을 찬양했으며, 젊은 시절 신비주의(occult)에도 심취했다.

소설 『야만인의 눈 아래에서』로 문명을 떨쳤고, 1889년 낭시 지역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임기 1889-1893년, 및 1906-1923년[23]). 드레퓌스 사건을 거치며 반드레퓌스주의자(anti-Dreyfusard)[1]가 되었고, "국가주의(nationalisme)"라는 용어를 대중화했다. 그는 "국가주의와 보호주의"라는 강령을 내세웠다.[4]

정치적으로 폴 데를레드(Paul Déroulède)의 애국자 동맹(Ligue des Patriotes) 지도자가 되었으며(1914년),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와 가까웠지만 공화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국민연합(Union Sacrée) 정치 휴전을 지지했다.

1894년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프랑스 통일을 우선하는 입장에서 에밀 졸라 등과 대립했다. 정교분리에 대해서는 가톨릭계를 지지하며, 장 조레스, 아리스티드 브리앙 등과 격렬하게 대립했다[24](1905년, 정교분리법 성립).

1906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1]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성스러운 연합을 열렬히 지지했고, 전통주의·프로테스탄트·사회주의와 더불어 유대인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만년에 바레스는 가톨릭(Catholic) 신앙으로 돌아와 프랑스 교회 건물 복원 운동에 참여했고, 6월 24일을 잔 다르크(Joan of Arc)를 기리는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는 데 기여했다. 사망에 임해서는 국장으로 치러졌고,[25] 고향 샬름의 묘지에 매장되었다.[26]

2. 1. 초기 생애

젊은 모리스 바레스의 초상화


모리스 바레스는 1862년 8월 19일 프랑스 로렌 지방 보주주에서 태어났다.[21][22] 8세에 프로이센의 점령을 경험한 것이 민족주의 사상가의 원점이 되었다. 낭시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1883년 파리대학교로 전학했다.

낭시의 리세(lycée)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으며, 훗날 ''뿌리 뽑힌 자들''에서 사회적 야망가 폴 부테이유로 묘사된 오귀스트 부르도(Auguste Burdeau)의 수업을 들었다. 1883년 파리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라탱 지구(Quartier Latin)에 정착하여 1880년대에 르콩트 드 릴(Leconte de Lisle)의 문예살롱(cenacle)과 상징주의(Symbolism (arts)) 작가들과 친분을 맺었고,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한 번 만나기도 했다.[8][2]

월간 정기 간행물인 ''Jeune France''(''젊은 프랑스'')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몇 달 동안만 존속한 자신의 정기 간행물 ''Les Taches d'encre''를 발행했다. 4년간의 저널리즘 경력 후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야만인의 눈 아래서''(Sous l'œil des barbares, 1888)를 썼는데, 이는 ''나의 삼부작''(trilogie du moi, 또는 ''나의 숭배''(Le Culte du moi) 또는 ''자아 숭배''(The Cult of the Self)라고도 함)의 첫 번째 권이며, ''자유로운 인간''(Un Homme libre, 1889)과 ''베레니스의 정원''(Le Jardin de Bérénice, 1891)으로 완성되었다. ''자아 숭배'' 삼부작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감각적 쾌락에 대한 변론을 펼쳤다.

2. 2. 정치 입문과 민족주의 활동

바레스는 1889년 낭시 지역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23] 그는 불랑제 장군을 지지하며 포퓰리즘적 성향을 보였으며,[3] 낭시에서 불랑제파 신문을 발행하고 27세에 "국가주의, 보호무역주의,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당선되었다.[4]

드레퓌스 사건을 거치며 바레스는 우익으로 전향, 샤를 모라스와 함께 반드레퓌스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8] 레옹 블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파 합류를 거부하고 반유대주의 팸플릿을 썼으며,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것을 나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인종으로부터 추론한다"고 주장했다.[5][6]

1894년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 잡지 ''라 코카르드''(The 코카드)를 창간했으며,[7] 이 잡지에는 프레데리크 아무레티, 샤를 모라스, 르네 보이르브 등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했다.[4]

바레스는 프랑스 조국 연맹 지도자를 거쳐 폴 드루레드의 ''애국자 연맹''에 가입, 1914년에는 애국자 연맹의 지도자가 되었다.[8] 액시옹 프랑세즈 창립자 샤를 모라스와 가까웠으나, 왕당파는 아니었다.

1906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21] 같은 해 센 주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사망할 때까지 의석을 유지했다. 공화주의 민주 연합 소속으로, 1908년에는 장 조레스에밀 졸라팡테옹 안치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바레스는 성전 연합을 지지하여 "학살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 그는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모라스와 대립하기도 했다. 전후 바레스는 룩셈부르크 합병과 라인란트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으며,[9] 1920년, 국회는 잔 다르크를 기리는 국가 기념일을 제정하자는 그의 법안을 채택했다.

2. 3. 말년

바레스는 말년에 가톨릭으로 귀의하여 프랑스 교회 건물 복원 운동에 참여했다.[20] 1922년에는 오리엔탈리즘 로맨스 소설인 《오론테스 강변의 정원》(프랑스어: Un jardin sur l'Oronte)을 출판했는데, 이는 동명의 오페라 (오론테스 강변의 정원 (오페라))의 기초가 되었고, 이로 인해 la querelle de l'Oronte프랑스어(오론테스 논쟁)이라고 불리는 논쟁을 일으켰다.[20]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바레스가 신성과 속성을 섞어 놓은 방식에 충격을 받았고, 그의 여주인공 오리앙트가 이교도이면서 동시에 매혹적이라는 점에 반발했다.[20]

1923년 12월 4일, 바레스는 뇌이쉬르센에서 사망했다.[21][22]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25] 그는 고향인 보주주 샬름의 묘지에 묻혔다.[26]

3. 사상

바레스는 그의 문학 작품에서 영국의 미학주의와 이탈리아 퇴폐주의와 상응하는 사조인 상징주의와 관련이 있었다. 그는 가브리엘레 다눈치오와 가까운 동료였으며, 그의 작품은 인본주의적인 자아 사랑을 찬양했고, 젊은 시절 신비주의에도 심취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바레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국가에 대한 보다 유기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으로 변화하게 했다. 그는 반드레퓌스주의자[1]가 되어 "국가주의"라는 용어를 대중화했으며, "국가주의와 보호주의"를 강령으로 내세웠다.[4]

정치적으로 폴 데를레드의 애국자 동맹 등 다양한 단체에 참여했고, 1914년에는 그 지도자가 되었다. 군주당의 창립자인 샤를 모라스와 가까웠지만, 공화주의자로 남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국민연합 정치 휴전을 지지했으며, 후년에는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다. 프랑스 교회 건물 복원 운동에 참여했고, 6월 24일을 잔 다르크를 기리는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는 데 기여했다.

바레스는 정치 사상에서 아나톨 프랑스와 대립했으며, 20세기 전반 프랑스 젊은 지식인층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은 관념 소설 3부작 『자아 숭배』이며, 일기 형식의 『수첩 (Mes cahiers)』도 유명하지만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앙드레 브르통, 트리스탕 짜라를 중심으로 한 다다이스트초현실주의자들은 바레스가 극우 정치 사상에 경도된 것을 비판하며 1921년 5월 13일 즉흥극 「바레스 재판」을 상연했다. 이는 다다의 기관지 『리테라튀르』에 게재되었고,[27] 1981년 5월 『유리카』 제13권 제6호 「다다·초현실주의 특집호」에 아사부키 료지 번역으로 「자료 바레스 재판」이 게재되었다.[28]

알베르 티보데는 바레스 사상의 배후에 강한 반유대주의나치즘 신념이 예고로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29] 위버는 1880년대 후반 이후 바레스가 부랑제 운동, 반드레퓌스 진영에 가담하여 활약했고, "국민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주목하여, 국가사회주의의 흐름이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뿌리 깊게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했다.[30] 수시는 바레스의 사상을 파시즘의 전조였다고 평가했으며,[31][32] 스타른헬은 바레스 사상에서 절대적인 대중 신앙, 익명의 동물적 군중 속에서의 자아 망각, 민족의 공통된 의지와 운명을 구현하는 지도자의 영웅적 행위와 힘에 대한 니체적 열정, 국민을 생물학적으로 구성하는 "대지와 죽은 자"에 대한 본능적 애착을 발견하고 그를 파시즘의 선구자로 보았다.[31]

3. 1. 초기: 개인주의와 자아 숭배



바레스는 초기 작품에서 개인의 자아와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아 숭배'(Le Culte du moi, 영어: The Cult of the Self) 3부작을 통해 개인주의적이고 탐미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8][2] 이 3부작은 《야만인의 눈 아래서》(Sous l'œil des barbares, 1888), 《자유로운 인간》(Un Homme libre, 1889), 《베레니스의 정원》(Le Jardin de Bérénice, 1891)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감각적 쾌락에 대한 변론을 펼쳤다.

3. 2. 민족주의로의 전환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바레스는 프랑스 혁명에 뿌리를 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국가에 대한 보다 유기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으로 이념적 변화를 겪었다. 그는 주요 반드레퓌스주의자[1]가 되었고,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국가주의(nationalisme)"라는 용어를 대중화했다. 그는 "국가주의와 보호주의"를 강령으로 내세웠다.[4]

샤를 모라스와 함께 반드레퓌스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 바레스는[8] 사회주의 지도자 레옹 블룸의 드레퓌스파 합류 제안을 거부하고, 여러 편의 반유대주의 팸플릿을 썼다. 그는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것을 나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인종으로부터 추론한다"라고 썼다.[5][6] 그의 반유대주의는 당시의 과학적 인종주의 이론과 성경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6]

바레스는 자신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1894년 9월부터 1895년 3월까지[7] 단명했던 잡지 ''라 코카르드''(The 코카드)를 창간하여 극좌와 극우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 했다.[3] 국수주의적이고 반의회주의적이며 반외세적인 ''코카르드''에는 프레데리크 아무레티, 샤를 모라스, 르네 보이르브, 페르낭 펠루티에 등 다양한 배경(왕당파,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유대인, 프로테스탄트[2])을 가진 집필진이 참여했다.[4]

정치적으로 그는 폴 데를레드의 애국자 동맹(Ligue des Patriotes)과 같은 다양한 단체에 참여했으며, 1914년에는 그 지도자가 되었다.[8] 군주당(Action Française)의 창립자인 샤를 모라스와 가까웠지만, 공화주의자로 남았다. 바레스는 당시 다양한 프랑스 군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인물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3. 3. 반유대주의

드레퓌스 사건 당시 바레스는 우익으로 전향하여 샤를 모라스와 함께 반(反)드레퓌스파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8] 레옹 블룸은 바레스에게 드레퓌스파에 합류할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바레스는 이를 거부하고 반유대주의 팸플릿을 여러 편 썼다. 그는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것을 나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인종으로부터 추론한다"고 썼다.[5][6] 바레스의 반유대주의는 당시의 과학적 인종주의 이론과 성경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6]

제1차 세계대전 중, 바레스는 성전 연합을 지지하며 프랑스 유대인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과거의 반유대주의적 태도에서 부분적으로 변화했다. 그는 유대인을 전통주의자, 프로테스탄트, 사회주의자와 함께 "국가적 천재성"의 네 가지 요소 중 하나로 칭송하며, 유대인을 "반(反)프랑스"적인 존재로 규정한 모라스와 대립했다.

알베르 티보데는 바레스 사상의 배후에 강한 반유대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29]

3. 4. 파시즘과의 연관성

일부 학자들은 바레스의 사상을 파시즘의 전조로 해석한다. 제브 스타른헬(Zeev Sternhell)은 바레스 사상에서 절대적인 대중 신앙, 익명의 동물적 군중 속에서 자아의 망각, 민족의 공통된 의지와 운명을 구현하는 지도자의 영웅적 행위와 힘에 대한 거의 니체적인 열정, 국민을 생물학적으로 구성하는 것("대지와 죽은 자")에 대한 본능적 애착[31] 등을 지적하며 그를 파시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그러나 스턴헬의 주장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격렬한 논쟁("스턴헬 논쟁")을 야기했는데,[33] 그의 주장은 매우 자극적이지만, 무리한 전개나 오해도 많아 다른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34]

4. 작품

모리스 바레스는 소설, 수필, 기행문,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소설'''

바레스는 초기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아 탐구에 몰두하는 Le Culte du moi프랑스어 (나의 숭배) 3부작을 발표했다.


  • Sous l'œil des barbares프랑스어 (야만인의 눈 아래, 1888)
  • Un Homme libre프랑스어 (자유인, 1889)
  • Le Jardin de Bérénice프랑스어 (베레니스의 정원, 1891)


이후 L'Ennemi des lois프랑스어 (법률의 적, 1892)을 발표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전환한 후에는 Le Roman de l'énergie nationale프랑스어 (국가 에너지의 소설) 3부작을 통해 애국심과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Les Déracinés프랑스어 (뿌리 뽑힌 사람들, 1897)
  • L'Appel au soldat프랑스어 (병사를 향한 호소, 1900)
  • Leurs figures프랑스어 (그들의 모습, 1902)


1897년 출판된 ''뿌리 뽑힌 사람들''


그 외 작품은 다음과 같다.

  • Au service de l'Allemagne프랑스어 (독일을 섬기며, 1905)
  • Colette Baudoche프랑스어 (콜레트 보도슈, 1909)
  • La Colline inspirée프랑스어 (영감의 언덕, 1913)
  • Le Génie du Rhin프랑스어 (라인의 천재, 1921)
  • Un jardin sur l'Oronte프랑스어 (오론테 강변의 정원, 1922)


'''수필 및 기행문'''

바레스는 스페인과 동방에 대한 낭만적인 묘사를 담은 여행기를 다수 남겼다.[17][18][19]

  • 『피, 쾌락, 죽음: 영혼의 애호가. 스페인 여행, 이탈리아 여행 등』(1894)
  • 『사랑과 슬픔에 바쳐진 것. 베네치아의 죽음』(1903)
  • 『스파르타 여행』(1906)
  • 『엘 그레코(El Greco) - 톨레도의 비밀』(1911)
  • 『레반트 지방 탐사』(1923)
  • Scènes et Doctrines du nationalisme프랑스어 (국가주의와 드레퓌스 사건, 1902)
  • Les Amitiés françaises프랑스어 (프랑스의 우정, 1903)
  • Ce que j'ai vu à Rennes프랑스어 (렌에서 본 것, 1904)
  • Ce que j'ai vu au temps du Panama프랑스어 (파나마 시대에 본 것, 1906)
  • La Grande pitié des églises de France프랑스어 (프랑스 교회의 큰 자비, 1914)
  • Une visite à l'armée anglaise프랑스어 (영국군 방문, 1915)
  • Les Diverses Familles spirituelles de la France프랑스어 (프랑스의 다양한 정신적 가족들, 1917)
  • L'Âme française et la Guerre프랑스어 (프랑스의 영혼과 전쟁, 1915-1920)
  • 제1권: L'Union Sacrée프랑스어 (신성동맹)
  • 제2권: Les saints de la France프랑스어 (프랑스의 성인들)
  • 제3권: La croix de guerre프랑스어 (전쟁 훈장)
  • 제4권: L'amitié des tranchées프랑스어 (참호의 우정)
  • 제5권: Les voyages de Lorraine et d'Artois프랑스어 (로렌과 아르투아 여행)
  • 제6권: Pour les mutilés프랑스어 (부상자들을 위해)
  • 제7권: Sur le chemin de l'Asie프랑스어 (아시아로 가는 길에서)
  • 제8권: Le suffrage des morts프랑스어 (죽은 자들의 투표권)
  • 제9권: Pendant la bataille de Verdun프랑스어 (베르됭 전투 중에)
  • 제10권: Voyage en Angleterre프랑스어 (영국 여행)
  • 제12권: Les tentacules de la pieuvre프랑스어 (문어의 촉수들)
  • Souvenirs d'un officier de la Grande armée, par Jean-Baptiste-Auguste Barrès ; publiés par Maurice Barrès, son petit-fils프랑스어 (대군 장교의 회상, 장-바티스트-오귀스트 바레스 저; 그의 손자인 모리스 바레스가 발표, 1923)
  • Chronique de la Grande Guerre프랑스어 (대전 연대기, 1920-1924)
  • Pour la haute intelligence française프랑스어 (프랑스의 고등 지성을 위해 - 『과학의 동원』, 1925)


'''기타'''

바레스는 1896년부터 1918년까지 총 11권에 달하는 『나의 수첩』을 집필했다.

''나의 수첩'' (전11권)
권수출판 기간
나의 수첩 1권1896년 ~ 1898년
나의 수첩 2권1898년 ~ 1902년
나의 수첩 3권1902년 ~ 1904년
나의 수첩 4권1904년 ~ 1906년
나의 수첩 5권1906년 ~ 1907년
나의 수첩 6권1907년 ~ 1908년
나의 수첩 7권1908년 ~ 1909년
나의 수첩 8권1909년 ~ 1911년
나의 수첩 9권1911년 ~ 1912년
나의 수첩 10권1913년 ~ 1914년
나의 수첩 11권1914년 ~ 1918년


4. 1. 소설

Le Culte du moi프랑스어 (나의 숭배) 3부작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감각적 쾌락에 대한 변론을 펼쳤으며, 다음과 같은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 Sous l'œil des barbares프랑스어 (야만인의 눈 아래, 1888)
  • Un Homme libre프랑스어 (자유인, 1889)
  • Le Jardin de Bérénice프랑스어 (베레니스의 정원, 1891)


이후 L'Ennemi des lois프랑스어 (법률의 적, 1892)과 여행 인상기인 Du sang, de la volupté, de la mort프랑스어 (피, 쾌락, 죽음, 1893)을 통해 자기애에 대한 변론을 보충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영향을 받아 반드레퓌스파에 서게 된 바레스는 샤를 모라스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이는 그가 정치적으로 우익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레스는 땅과 죽은 자("la terre et les morts프랑스어", "땅과 죽은 자")에 대한 숭배를 기반으로 하는 서정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로 방향을 틀었다.[8]

Le Roman de l'énergie nationale프랑스어 (국가 에너지의 소설) 3부작은 지역 애국심, 군국주의, 자신의 뿌리와 가족에 대한 믿음, 그리고 프랑스의 독특한 특성 보존에 대한 옹호를 담고 있다.

  • Les Déracinés프랑스어 (뿌리 뽑힌 사람들, 1897)
  • L'Appel au soldat프랑스어 (병사를 향한 호소, 1900)
  • Leurs figures프랑스어 (그들의 모습, 1902)


''뿌리 뽑힌 사람들''은 파리에서 성공을 거머쥐기 위해 나선 7명의 젊은 로렌 사람들의 모험을 그린다. 그중 6명은 삼부작의 두 번째 소설인 ''병사를 향한 부름''에서 생존하며, 불랑주의의 역사를 보여준다. 속편인 ''그들의 모습''은 파나마 스캔들을 다룬다.

이후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 Au service de l'Allemagne프랑스어 (독일을 섬기며, 1905)
  • Colette Baudoche프랑스어 (콜레트 보도슈, 1909)
  • La Colline inspirée프랑스어 (영감의 언덕, 1913)
  • Le Génie du Rhin프랑스어 (라인의 천재, 1921)
  • Un jardin sur l'Oronte프랑스어 (오론테 강변의 정원, 1922)

4. 2. 수필 및 기행문

바레스는 스페인을 "입안에서 고추처럼 빠르게 격렬한 감정을 남기는 아프리카"라고 묘사하며 낭만적으로 신화화했다.[17] 그는 "남부"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열정을 작품에 담았으며, 특히 무어인 지배 시대를 강조했다. 그는 당시 스페인을 경제적, 관료적 합리화에 저항하는 국가로 해석했다.[18] 1892년, 1893년, 1902년에 스페인을 방문하여 톨레도에 대한 글을 남겼다.[19]

  • 『피, 쾌락, 죽음: 영혼의 애호가. 스페인 여행, 이탈리아 여행 등』(1894)
  • 『사랑과 슬픔에 바쳐진 것. 베네치아의 죽음』(1903)
  • 『스파르타 여행』(1906)
  • 『엘 그레코(El Greco) - 톨레도의 비밀』(1911)
  • 『레반트 지방 탐사』(1923)
  • 『국가주의와 드레퓌스 사건』(1902) - ''Scènes et Doctrines du nationalisme''
  • 『프랑스의 우정』(1903) - ''Les Amitiés françaises''
  • 『렌에서 본 것』(1904) - ''Ce que j'ai vu à Rennes''
  • 『파나마 시대에 본 것』(1906) - ''Ce que j'ai vu au temps du Panama''
  • 『프랑스 교회의 큰 자비』(1914) - ''La Grande pitié des églises de France''
  • 『영국군 방문』(1915) - ''Une visite à l'armée anglaise''
  • 『프랑스의 다양한 정신적 가족들』(1917) - ''Les Diverses Familles spirituelles de la France''
  • 『프랑스의 영혼과 전쟁』(1915-1920) - ''L'Âme française et la Guerre''
  • 제1권: 신성동맹 - ''Tome I : L'Union Sacrée''
  • 제2권: 프랑스의 성인들 - ''Tome II : Les saints de la France''
  • 제3권: 전쟁 훈장 - ''Tome III : La croix de guerre''
  • 제4권: 참호의 우정 - ''Tome IV : L'amitié des tranchées''
  • 제5권: 로렌과 아르투아 여행 - ''Tome V : Les voyages de Lorraine et d'Artois''
  • 제6권: 부상자들을 위해 - ''Tome VI : Pour les mutilés''
  • 제7권: 아시아로 가는 길에서 - ''Tome VII : Sur le chemin de l'Asie''
  • 제8권: 죽은 자들의 투표권 - ''Tome VIII : Le suffrage des morts''
  • 제9권: 베르됭 전투 중에 - ''Tome IX : Pendant la bataille de Verdun''
  • 제10권: 영국 여행 - ''Tome X : Voyage en Angleterre''
  • 제12권: 문어의 촉수들 - ''Tome XII : Les tentacules de la pieuvre''
  • 『대군 장교의 회상, 장-바티스트-오귀스트 바레스 저; 그의 손자인 모리스 바레스가 발표』(1923) - ''Souvenirs d'un officier de la Grande armée, par Jean-Baptiste-Auguste Barrès ; publiés par Maurice Barrès, son petit-fils''
  • 『대전 연대기』(1920-1924) - ''Chronique de la Grande Guerre''
  • 『프랑스의 고등 지성을 위해』(1925) - ''Pour la haute intelligence française'' - 『과학의 동원』

4. 3. 기타

''나의 수첩'' (전11권)
권수출판 기간
나의 수첩 1권1896년 ~ 1898년
나의 수첩 2권1898년 ~ 1902년
나의 수첩 3권1902년 ~ 1904년
나의 수첩 4권1904년 ~ 1906년
나의 수첩 5권1906년 ~ 1907년
나의 수첩 6권1907년 ~ 1908년
나의 수첩 7권1908년 ~ 1909년
나의 수첩 8권1909년 ~ 1911년
나의 수첩 9권1911년 ~ 1912년
나의 수첩 10권1913년 ~ 1914년
나의 수첩 11권1914년 ~ 1918년


5. 한국에서의 수용

일제강점기에 신성와이치(新城和一)가 《콜레트 보도슈》를 《로렌의 소녀》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잡지 《백화》에 1915년 5월부터 1916년 1월까지 연재했다.[23] 해방 후에는 《뿌리 뽑힌 자들》, 《베레니스의 정원》, 《자아 숭배》, 《엘 그레코 - 톨레도의 비밀》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번역서가 적고 인기가 많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6. 영향 및 평가

바레스는 20세기 전반 프랑스 젊은 지식인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나톨 프랑스와 함께 당대 정치 사상에서 대조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샤를 모라스를 비롯한 프랑스 우익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8] 앙리 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프랑수아 모리아크, 루이 아라고 등 여러 세대의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오토크롬 사진, 오귀스트 레옹 촬영, 1918년


그러나 앙드레 브르통, 트리스탕 짜라를 중심으로 한 다다이스트초현실주의자들은 바레스가 극우적인 정치 사상에 경도된 것을 비판하며 1921년 5월 13일 즉흥극 「바레스 재판」을 상연했다.[27] 이 재판은 "정신의 안전에 대한 공격" 혐의로 바레스를 기소하고 20년 강제 노역형을 선고하는 내용의 허구적인 재판이었으며, 다다이즘의 해산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알베르 티보데는 바레스 사상의 배후에 강한 반유대주의나치즘 신념이 예고로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29] 유진 웨버는 1880년대 후반 이후, 부랑제 운동과 반드레퓌스 진영에서 활약했고, "국민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레스의 사상에 주목하여, 국가사회주의의 흐름이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뿌리 깊게 지속되고 있음에 주의를 환기했다.[30] 로버트 수시는 바레스의 사상을 파시즘의 전조였다고 평가했고,[31][32] 제브 스타른헬은 바레스 사상 속에 절대적인 대중 신앙, 익명의 동물적 군중 속에서 자아의 망각, 민족의 공통된 의지와 운명을 구현하는 지도자의 영웅적 행위와 힘에 대한 니체적인 열정, 국민을 생물학적으로 구성하는 것—"대지와 죽은 자"—에 대한 본능적 애착이 보인다고 하여 그를 파시즘의 선구자로 보았다.[31]

참조

[1] 뉴스 Maurice Barres and His Books The Living Age 1922-11-25
[2] 웹사이트 Biographical notice http://www.ac-nancy-[...] 2007-09-30
[3] 서적 La nouvelle droite fin de siècle Hachette Pluriel 1987
[4] 논문 Nationalism, Socialism and National-Socialism in France 1962
[5] 뉴스 5 Lessons of the DSK Affair http://www.thedailyb[...] The Daily Beast 2011-07-02
[6] 웹사이트 Maurras (1858 (sic)-1952): ou le mythe d'une droite révolutionnaire http://coursenligne.[...] 2007-09-26
[7] 웹사이트 Biographical notice http://www.ac-strasb[...] Chr. Biet, J.-Paul Brighelli, J.-Luc Rispail 1984
[8] 웹사이트 Biographical notice of Barrès http://www.academie-[...] 2007-06-07
[9] 서적 Geschichte Luxemburgs 2013
[10] 서적 Maurice Barrès et le nationalisme français Complexe 1985
[11] 서적 Le Siècle des intellectuel Seuil 1997
[12] 서적 Le nationalisme des nationalistes. Un problème pour l'histoire des idées politiques en France Kimé 1991
[13] 웹사이트 Le peuple français chez Maurice Barrès: une entité insaisissable entre unité et diversité http://www.sens-publ[...] 2007-02-02
[14] 서적 Les Déracinés (Roman de l'énergie nationale I) R. Laffont Bouquins 1994
[15] 웹사이트 discourse of reception at the Académie française http://www.academie-[...] 2007-06-07
[16] 뉴스 Le « grand remplacement » de Maurice Barrès https://es-es.facebo[...] Désintox, ARTE
[17] 논문 ¿Materia de España? Imaginarios nacionales y persistencia del estereotipo español en la cultura francesa (1898-1936) https://journals.ope[...] 2018
[18] 논문 Maurice Barrès y España https://www.ehu.eus/[...] Universidad del País Vasco 2007
[19] 논문 Toledo o el secreto de Maurice Barrés https://revistas.ucm[...] 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 1999
[20] 서적 The Bookman https://books.google[...] 1923
[21] 웹사이트 Maurice BARRÈS http://www.academie-[...] Académie française 2020-07-02
[22] 웹사이트 Encyclopédie Larousse en ligne - Maurice Barrès https://www.larousse[...] Éditions Larousse 2020-07-02
[23] 논문 戦時下の日本におけるモーリス・バレスの受容について https://hdl.handle.n[...] お茶の水女子大学 2016-03-28
[24] 논문 La laïcité ou l’histoire mouvementée d’un concept français http://journals.open[...] 2004-09-01
[25] 웹사이트 Funérailles de M. Maurice Barrès http://www.academie-[...] Académie française 2020-07-02
[26] 웹사이트 CHARMES (88) : cimetière https://www.landruci[...] Cimetières de France et d'ailleurs 2020-07-02
[27] 웹사이트 Litterature N°19-20, Aragon, Breton, Soupault http://melusine-surr[...] Mélusine (le Centre de Recherches sur le Surréalisme de Paris III) 2020-07-02
[28] 웹사이트 資料 バレス裁判(「リテラチュール」誌、1921年8月、20号掲載)朝吹亮二訳 https://iss.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0-07-02
[29] 서적 Hisoire de la littérature française de 1789 à nos jours Stock 1936
[30] 논문 ファシスト・イデオロギーの比較史—フランスの国民社会主義構想を中心に— 1996-09
[31] 서적 ファシズムの偏流 —ジャック・ドリオとフランス人民党 上 国書刊行会 2020-11-20
[32] 서적 Fascism in France, The Case of Maurice Barrè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2
[33] 논문 ファシスト・イデオロギーの比較史—フランスの国民社会主義構想を中心に— 1996-09
[34] 서적 奇妙な廃墟 フランスにおける反近代主義の系譜とコラボラトゥール 1945:もうひとつのフランス 別巻 国書刊行会 198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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